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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판 위 ‘공포의 외인구단’

“우리가 종합대회에 나가게 됐어!” 김홍일(33) 감독의 한마디에 주장 함정우(25)는 울컥했다. 가슴이 벅차 말을 할 수 없었다. 스틱을 놓은 지난 3년간의 서러움이 스쳐갔다. 대학 졸업 뒤 실업팀 입단이 좌절되면서 입은 상처는 컸다. 실업팀이라곤 한라와 하이원 두 개뿐인 한국 아이스하키계에서 소속팀을 찾지 못하면 정체성도 잃는다. “실업 두 팀에 전화해 연습생이라도 시켜달라고 사정”했지만 프로의 세계는 냉혹했다. 결국 여행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입대를 생각하던 찰나 김홍일 감독의 전화 한 통이 그를 살렸다. “다시 해볼 기회를 얻었다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는 목소리가 떨린다.

■ 웨이브즈, 아이스하키의 독립군 야구의 고양 원더스처럼 빙판을 떠난 선수들에게 아이스하키 독립구단 웨이브즈는 구원의 밧줄이다. 김홍일 감독이 주축이 되어 지난해 8월 창단한 웨이브즈는 올해 10월 대한아이스하키협회에 정식 팀으로 등록됐다. 10월 처음 출전한 공식대회 코리안리그에서는 준우승이란 돌풍을 일으켰고, 11월 전국종합아이스하키대회에서는 조별리그에서 탈락했지만 “열정의 팀”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함정우는 두 대회 7경기에서 6골 3도움을, 윤국일(39)은 3골 3도움으로 만만치 않은 실력을 과시했다. 독립구단이 대한체육회 산하 협회의 공식 대회에 출전한 것은 처음이다. 아이스하키협회 쪽은 “대학팀이 거의 없어 아이스하키의 저변 확대를 위해서도 좋다고 생각해 기회를 줬다”고 말했다. 아이스하키를 다시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선수들은 행복했다. 김홍일 감독은 “대회에 나갈 수 있다면 그 어떤 편견도 참을 수 있고 잘할 자신이 있었다”고 말했다. 지난달 26일엔 종합아이스하키대회 고려대와의 경기에서 종료 17초를 남기고 역전 골을 허용한 뒤 골리 이승엽(23)이 빙판에 드러누워 한동안 일어서지 못해 보는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관계자들은 “운동만 하는 젊은 선수들과 맞붙어 기대 이상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 일 마치고 새벽훈련은 기본 열정으로 뭉친 팀원 26명은 모두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선수로도 뛰는 김홍일 감독은 실업팀 안양 한라 출신으로 아시아리그 통산 100공격포인트를 기록한 에이스였다. 국가대표 출신 김민규(30), 고려대 1학년 때 팀 내 갈등으로 자퇴하며 빙판을 떠났던 이승엽, 기량은 여전했지만 후배들에게 길을 터줘야 한다는 생각에 34살에 은퇴한 하이원 창단 멤버 윤국일, 연세대 기대주였다가 졸업한 뒤 교사의 길을 택한 김현민(26) 등이 수년 만에 다시 스틱을 잡았다. 이승엽은 “자퇴서를 내고 입대한 뒤 후회도 했다. 하키가 싫어서 그만둔 게 아니었던 만큼 이번에 날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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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전문 선수가 아니고 전용 경기장도 없어 연습훈련이 쉽지 않다. 김홍일 감독은 “시간 맞추는 게 가장 힘들다”고 했다. 직장인인 이들은 일주일에 서너 번 정도 밤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 훈련한다. 대회가 오후에 있으면 출전을 못하는 선수도 있다. 팀의 최고령이자 애니메이션 제작사 임원인 오효석(40)은 “내년에 개봉하는 애니메이션을 준비하느라 후배들의 연습상대만 했고 대회에는 출전하지 못했다”고 했다. 아이스하키 수입유통업을 하는 윤국일은 “체력적인 게 가장 힘들다. 개인 약속은 잡지 않는다”고 했다. 함정우는 “시간이 나면 개인훈련을 하는 등 몸은 힘들어도 즐겁다”고 말했다.

■ 스폰서 20개, 그래도 어려운 재정 김홍일 감독이 발로 뛰며 잡은 스폰서가 20여개. 선수들에게 회식을 시켜주는 식당부터 웨이트트레이닝을 공짜로 하게 해주는 헬스장 등 각양각색이다. 기업에 비하면 적은 금액이지만 그들에겐 소중하다. 돈이 들어오면 헬멧을 사고 장갑 사고 스케이트를 사는 식으로 팀은 조금씩 제 모습을 갖추고 있다. 6개월 전부터 선수들에게 교통비 정도의 수당도 지급하고 있다. 김홍일 감독은 “코리안리그에서 2위를 한 뒤 이전에는 거절했던 업체에서도 연락이 온다. 꾸준히 훈련할 수 있는 빙상장도 구했다”며 웃었다.

무엇보다 선수들에게 꿈이 생긴 것이 큰 성과다. 윤국일은 “잊고 살던 지도자의 꿈을 다시 꾸고 있다”고 했고 이승엽과 함정우, 일본 대학 졸업 뒤 한국 실업팀 입단이 좌절됐던 강다니엘(25)은 “상무 입대를 목표로 삼았다”고 했다. 김홍일 감독은 “고양 원더스처럼 좋은 선수들은 실업팀으로 보내거나 국가대표로도 뛰게 하고 싶다. 나아가 전용 빙상장도 만들고 싶다”고 바랐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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